사진의 발명은 서양미술사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화가들은 사물의 사실적 묘사라는 임무에서 해방되어 빛, 색, 선과 구도 등 회화의 기본 요소들을 연구하여 그 안에 작가적 감성을 담아내는 데에 더욱 집중했다. 본 글에서는 사진의 발명 이후 등장한 인상주의와 모더니즘 미술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한다.
사진의 발명
19세기초 프랑스 미술계에는 쿠르베(Gustave Courbet)와 같이 산업혁명이 인간의 문명에 끼친 부정적 영향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사실주의' 작가들과 밀레(Jean-Francois Millet)와 같이 전원으로 돌아가 농촌의 피폐한 현실들을 따스한 감성으로 담아낸 '바르비종 학파'등이 주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진의 발명으로 미술계는 뜻하지 않고 예상치도 못한 변혁의 시간을 맞닥뜨려야 했다. 1830년경 프랑스의 니엡스 형제(Claude Niepce, Joseph Niepce)는 '카메라 옵스큐라' 방법을 이용하여 풍경의 이미지를 인화하는 기술을 발명했다. 이는 햇볕에 의해 질산은이 검게 변한다는 조사이어 웨지우드 (Josiah Wedgwood)의 발견을 발전시킨 결과였다. 카메라 옵스큐라란 암실에 작은 구멍사이로 밖의 풍경이 암실 벽에 거꾸로 비치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는 그전부터 화가들이 작품을 묘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그동안 미술만이 가지고 있었던 '사실에 대한 재현'이라는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가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로 많은 아티스트들이 패닉상태에 빠졌다. 지금으로 말하면 AI기술이 인간의 많은 능력들을 대체하며 인간이 설 자리를 앗아갈 것이라는 우려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당시 사진의 발명에 대한 시선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렸다. 하나는 사진이 그림을 잠식하고 화가들의 일자리를 앗아갈 것이라는 비관적인 시각과, 다른 하나는 오히려 사진과 빛의 관계를 더욱 깊이 연구하여 회화만이 표현해 낼 수 있는 독특한 표현 방식을 연구하자는 긍정적인 시각이 그것이었다.
인상주의의 등장
후자에 해당된 작가들은 주로 당시 파리에서 활동했던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었는데 그들이 훗날 미술사에서 '인상주의' 작가로 기록된다. 모네(Claude Monet), 피사로(Camille Pissarro), 드가(Edgar Degars),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등 당시 뜻을 함께 했던 인상주의 작가들은 빛 즉 광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야외에서 빛의 효과를 관찰하여 그 빛이 닿는 순간 발산되는 물체의 형상이나 색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화폭에 옮기고자 노력했다. 자연에 그대로 노출되어 한시도 멈추지 않는 형상들과 자연광에 따라 매 순간 그 모습을 달리하며 발산하는 색채들을 잡아내기란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었으나 그럴수록 작가들은 더욱 집요하게 빠져들었다. 당시 보수적인 프랑스미술계에서 '살롱전'이라는 전시에 당선된다는 것은 그 높은 관문을 바로 넘어가는 보증수표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직은 전통적인 회화 방식과 캐논에 깊이 젖어있던 당시 미술계는 이렇게 혁신적인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0년이란 세월 동안 살롱전에 낙선을 거듭했던 모네는 결국 1874년 동료작가들과 예술가 조합을 결성하고 자신들의 전시를 직접 기획하여 발표하였다. 당시 전시했던 모네의 '해돋이-인상'이라는 작업은 본 사조가 '인상주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전시를 보러 온 미술평론가 루이 르로아(Louis Leroy)가 조롱적인 어조로 완성된 작품이라곤 하나도 없이 그냥 '인상(impression)'만 스케치한 상태라고 비판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모더니즘 미술의 출현
이처럼 인상주의에 대한 시각이 처음에는 비난일색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호의적으로 바뀌었고 훗날 국제적인 사조로 자리매김을 하기에 이른다. 또한, 인상주의 작가들은 파리를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지로 정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중 후기 인상주의 작가로 불리는 폴 세잔(Paul Cezanne)이 회화를 대했던 전위적인 관념은 이후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사조 중의 하나인 큐비즘(Cubism)을 탄생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잔은 사물의 형태는 본래 이래야 한다는 고정된 사고방식을 지양했다. 그저 자신의 눈이 비추어진 데로 더 정확히는 자신의 관념대로 캔버스를 메꾸는데 초점을 두었다. 따라서, 그의 회화에는 전통적인 방식의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는 그가 그리고자 하는 사물과 주변에 대한 공간을 표현하는 데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캔버스의 화면 자체가 가지는 구성에 집중했다. 화면 자체가 가지는 구성의 주체는 세잔 자신이므로 작품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표현방식으로 제작된다. 이는 훗날 아방가르드 모더니즘미술에서 가장 중요시했던 '독창성'이라는 핵심요소로 발전된다. 이중 특히 피카소(Pablo Picasso)는 '우리는 모두 세잔에게 빚지고 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세잔이 강조했던 아티스트의 관념과 주관을 회화에 도입하여 확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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