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초 입체파 미술을 이끌었던 스페인의 작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고향 스페인에서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내전 소식은 그동안 잠재워졌던 그의 조국애를 자극했고 그는 작품을 통해 작가적 시대정신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번 글에서는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전하고 있는 '게르니카(Guernica)'에 담긴 피카소의 절규와 아티스트의 시대정신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게르니카의 대학살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바스크지역의 한 도시 게르니카는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 나치 군에의 무차별 공중 폭격을 당한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사회주의(Nationalist)를 지지하는 좌익 공화정부와 극우 민족주의(Fasist) 지지파 간에 내전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바스크(Basque) 지역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지역이었고 이를 정복하기 위해 반대파 정부가 독일 정부에 협조 요청을 함으로써 발발한 전쟁이었다. 1930년대 독일은 정치 경제적으로 매우 불안했고 극우파 정치집단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는 1933년 초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즉 국가 사회당이 선거에 승리해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36년 당시 스페인의 극우파를 이끌었던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장군은 독일의 히틀러와 손을 잡고 당시 내전 중에 있던 스페인의 좌익 공화정부를 몰아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게르니카 폭격의 구체적인 배경이다. 전쟁에 승리한 프랑코 정권은 스페인 정부를 차지하게 되지만 동시에 히틀러를 유럽 정복의 꿈에 부풀게 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 후에도 파리에 머물며 작품활동을 계속해 오던 피카소는 당시 뉴스를 통해 전쟁 소식을 접하게 되었는데 특히 프랑스의 일간지 L'Humanite에 실린 처참하게 희생된 전장의 모습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그동안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아티스트로서의 역할을 재고하게 된다.
피카소의 절규
이미 1차 세계대전을 겪은 피카소는 전쟁이 가져온 참혹함을 신화에 등장하는 황소의 머리를 한 반인반수 미노타우로스(Minotaur)와 죽어가는 투우사의 이미지를 통해 투영하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35년에 제작한 '미노타우로마키(Minotauromaquia)'는 게르니카의 기초가 된 전작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가 인생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제작한 작품이다. 당시 피카소는 아내 올가(Olga Khokhlova)와의 불화와 애첩의 임신 그리고 시대적 불안정이 중첩되어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겪으며 예술가로서 최대의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이러한 고통은 '미노타우로마키' 작품에서 미노타우로스의 괴물과 같은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미노타우로스는 신화에서 차용된 인물로서 욕심 많고 잔혹한 정복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를 정면으로 직면하고 있는 소녀의 한 손에는 꽃다발이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촛불이 들려있다. 이 두 인물의 사이에는 여성 투우사가 부상으로 쓰러져 말 위에 축 늘어져 있고, 뒤편 건물의 위층 창문 밖으로 두 소녀와 비둘기 두 마리가 아래의 모습을 관조하고 있는 듯하다. 왼쪽 귀퉁이에는 턱수염을 한 남자가 이러한 공포스러운 상황으로부터 도망이라도 치듯 허겁지겁 사다리를 오르는 모습과 저 멀리 배경으로 보이는 바다 위에는 돗을 단 작은 보트가 엿보인다. 이렇게 미노타우로마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스페인 국가관에서 전시되었던 '게르니카'벽화에서 확대된다.
아티스트의 시대정신
스페인 내전의 소식을 접했던 당시 피카소는 파리 만국박람의 스페인 국가관에 전시될 작품을 구상 중이었다. 신문에 게재된 잔혹한 살상의 현장을 접한 피카소는 이를 작품에 녹아내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게르니카'를 제작한다. 가로 776.6cm 세로 349.3cm의 거대한 벽화의 형태로 제작된 회화의 화면은 피라미드 구도를 중심으로 동물과 인간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성난 황소, 부상당한 말, 흐릿하게 그려진 새 가 한 그룹을 이루고 사망한 군인의 시체, 램프를 든 여성, 죽은 아이를 품에 안고 오열하는 어머니, 하늘을 바라보며 절규하는 여성이 또 다른 그룹을 이룬다. 이렇게 혼재된 상태로 뒤범벅이 되어 화면을 가득 메운 등장인물들은 전쟁으로 인한 혼돈과 공포를 그대로 드러낸다. 작품의 전체적인 색감은 흑백의 모노톤으로 절제되어 있는데 이에 관해서 다양한 해석이 전해진다. 시기적으로 칼라인쇄가 발명되기 전이었기에 피카소가 신문에서 본 것은 흑백사진이었고 작가는 신문에서 보인 긴장감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작품의 톤 역시 흑백으로 제한하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눈에 띄는 원색들을 배제함으로 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이미지들을 더욱 면밀히 관찰하게 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는 해석도 전해진다. 더불어, 피카소의 잠재의식에는 낭만주의 시대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던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가 회화로 기록한 나폴레옹 군대의 작혹한 학살 '1808년 5월 3일'이 계속 맴돌았다고 하는데 특히 고야가 보여준 아티스트로서의 시대정신을 본보기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게르니카에는 피카소의 개인적인 아픔과 스페인 국민으로서 자국의 불안한 정치적 현실에 대한 분노 함께 녹아 있다. 스페인 정부는 파리 만국박람회 이후 작가로 부터 '게르니카' 작업을 구매했다. 그러나 바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스페인에 또 다른 정치적 잡음들이 이어지면서 피카소는 뉴욕 현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에 작품 보관을 요청하였고, 1981년에 드디어 고국인 스페인으로 돌아와 현재는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국립 미술관(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ia)에 소장되어 있다.
'예술을 통한 마음의 웰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르셀 뒤샹의 '샘, 1917' 작품으로 보는 다다이즘 미술 (0) | 2023.05.28 |
---|---|
초현실주의 미술, 세계 대전으로 창조된 예술의 사조 (1) | 2023.05.28 |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 왕자가 영국 미술과 디자인의 발전에 미친 영향 (0) | 2023.05.16 |
사진의 발명이 가져온 미술의 진화, 인상주의와 모더니즘 미술의 출현 (0) | 2023.05.12 |
과일속에 감추어진 알레고리 미술: 사과, 포도, 오렌지 (0) | 2023.05.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