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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통한 마음의 웰빙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그리고 정치의 미술

by 웰빙클래스100 2023. 5. 29.

Jacques-Louis David, Bonaparte Crossing the Alps, 1801-5

 

프랑스 대혁명

왕과 귀족이 나라를 지배했던 18세기말 유럽에서 가장 부강했던 나라는 단연코 프랑스였다. 당시 프랑스 왕궁의 호화스러운 삶은 2006 개봉되었던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도 잘 묘사하고 있다. 로코코 시대의 화려한 사치와 향락의 문화를 물려받은 루이 16세가 이끄는 왕실은 당시 넘쳐나는 곡간의 빗장을 풀어 한도 없는 사치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귀족의 세력은 유럽에서 가장 형편없었다. 이는 당시 풍부한 농산물의 수익으로 인해 갑작스러운 부를 누린 부르주아 계층이 급격하게 증가하여 귀족의 수를 압도하였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당시 스페인과 함께 미국의 독립을 도왔을 당시 미국에서 함께 넘어온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권에 대한 이념들은 당시 지식인들과 시민계층의 인식에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더불어 프랑스의 적국이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의 공주인 마리 앙투와네트를 왕비로 맞아들였다는 부분은 시민들의 광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러던 중 1789년 파리 민중들이 바스티유를 습격하면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은 이나라 정치, 경제의 불안정을 가져왔고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올렸다. 이러한 시기에 시민출신의 영민한 통치자가 탄생했으니 그가 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이다.

 

나폴레옹

프랑스 대 혁명 후 나라는 안팎으로 위태위태한 상황에 처했다. 수많은 정권 다툼 속에서 정치 지도자들이 암살되거나 처형이 되었고, 내전과 폭동으로 경제 상황은 밑바닥을 치고 있었으며, 주변국가들은 이렇게 혼란한 틈을 타 프랑스를 침략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여기서 혜성처럼 등장한 전쟁의 신동 나폴레옹은 빠른 속도로 주변국을 정복하며 영토를 넓히기 시작했는데, 일반 시민계급 출신이었던 그에게 프랑스인들은 더욱 열광했다. 본래 문학을 사랑하고 예술을 즐겨했던 나폴레옹이 지은 업적은 비단 영토확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이집트 원정을 떠날 시 100여 명이 넘는 고고학자들을 함께 동반하여 많은 유물들을 프랑스로 가지고 왔을 만큼 문화에 대한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이는 훗날 문화재 약탈로 인정되어 대부분의 유물들을 본국으로 반송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지역에서 발견된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으로 인하여 2000년간 묻혔었던 고대 이집트의 문명에 대한 연구가 다시 시작된 것은 인류역사에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당시 비어 있던 루브르 궁을 박물관으로 개조하게 하여 그동안 수집했던 유물들을 따로 보존하고 전시하게 하였는데 그것이 오늘날 파리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의 전신이다.

 

정치의 미술

나폴레옹은 미술 애호가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는 영민했던 그가 교묘하게 이용했던 아트 브랜딩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회화라는 예술이 가지는 시각적이면서 지적인 홍보효과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을 마치 로마의 황제와 같은 절대적 권력의 이미지로 브랜딩 하였는데, 이러한 방법은 고대 이집트 시대 때부터 통치자들이 자신의 파워를 더욱 확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온 방법이기도 하다. 한 예로 한국에서는 한때 위스키 레이블로 사용되어 우리에게 잘 알려졌던 백마 탄 나폴레옹의 기세등등한 모습은 실제로 많이 과장된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이는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작가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Bonaparte Crossing the Alps, 1801-5)'이라는 작품으로써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로 두 번째 원정을 떠났을 당시의 모습을 담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나폴레옹은 그림에서 처럼 용맹스러운 백마를 탄 것이 아니라 당나귀를 타고 힘겹게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고 한다. 당시 다비드가 추구했던 신 고전주의 미술은 프랑스혁명 이후로 정치 개혁의 도구로 사용되며 신흥 부르주아 시민계급으로 부터 뜨거운 사랑과 지지를 받았다. 이와 찰떡궁합으로 맞아떨어졌던 나폴레옹의 이미지는 당시 정치 개혁을 아티스트들의 신분상승과 동일시했던 작가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작업이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이 외에도 앵그르 (Jean-Auguste-Dominique Ingres)를 비롯한 당대의 많은 작가들에 의해 미화되어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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