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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통한 마음의 웰빙

마르셀 뒤샹의 '샘, 1917' 작품으로 보는 다다이즘 미술

by 웰빙클래스100 2023. 5. 28.

Marcel Duchamp, 'Fountain, 1917', c.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20세기초 모던아트

1900년대를 들어서는 길목에서부터 향후 13년간 유럽은 그야말로 예술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는데 이는 이후 다다이즘 미술을 창시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진보적인 철학과 전위적인 행보와 확연한 대조를 이루면서 본 미술의 사조를 더욱더 창의적으로 돋보이게 하였다. 서양 미술사에서 근대미술로 분류되고 있는 20세기 초 미술의 특징은 예술의 독창성이 매주 강조되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독특한 표현방식들을 연구하는 크고 작은 작은 미술사조들이 만들어졌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스페인 출신의 작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가 큐비즘(Cubism)을 이끌었고,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는 야성적인 붓터치와 화려한 색채로 구성된 야수파(Fauvism) 미술을 선보였다. 이웃나라 독일 뮌헨에서는 러시아의 아티스트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가 ‘청기사파(Der Blaue Reiter)’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며 그의 동료이자 작곡가였던 쇤베르크(Arnold Schonberg)가 음악의 문법을 깨고 만든 12음 기법을 회화로 재현하는 시도를 하였다. 또한, 러시아 절대주의(Suprematism)를 대표하는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와 네덜란드의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은 기하학적인 선과 면을 이용한 매우 순수한 추상회화를 제작하기 위한 연구에 몰두해 있었다. 이렇게 유럽의 작가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그들의 가진 예술적 재능과 감성을 공유하고 협업하였다. 또한, 모던 발레의 길을 개척한 러시아의 발레단 발레루스(Ballet Russes)가 당시 유럽 모던아트의 중심지었던 파리로 자리를 옮기면서 당시 매우 수동적이고 이쁜 발레의 수준에 머물러 있던 프랑스 발레에 역동적인 움직임과 화려한 기술들을 가미시켜 프랑스발레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일조하였다. 이와 더불어 발레루스는 당대의 미술가와 음악인들과의 협업을 통하여 유럽 미술에 폭넓은 다이내믹을 선사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접하는 다원예술의 시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다이즘 미술의 출현

이렇게 차곡차곡 쌓여온 미술의 업적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과 동시에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이전까지 경제적인 여유 속에서 낙관적으로만 돌아가던 유럽은 한순간에 초토화되었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변해 있었다. 4년이나 지속되었던 이 전쟁으로 천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나았는데 이 중에는 전쟁의 기록을 위해 강제 동원되었거나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자원 입대한 미술가들도 속해있었다. 초창기에는 애국적인 모습을 보이던 아티스트도 장기간의 대전쟁을 겪으며 몸과 마음이 피폐질대로 피폐해졌다. 그들은 전쟁의 원인을 인류의 문명을 만들어낸 '이성과 논리'에 있다고 해석하였고 이것을 바탕으로 창조된 이전까지의 미술의 형태를 거부했다. 대신 이것들을 부정하고 조롱하는 방법을 통해서 전쟁이 불러온 잔혹한 현실을 고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다다이즘(Dadaism)이 탄생한 배경이다. 하나의 장르가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이성적인 행동의 결과라 여겼던 다다 운동은 당시 시문학과 미술, 그리고 연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보였다. 유럽에서는 스위스 취리히에 위치한 아티스트 클럽 카바레 볼테어(Cabaret Voltaire)에서 시작되었으며, 전쟁을 피해 파리에서 뉴욕으로 망명한 작가들에 의해 뉴욕 다다 운동이 펼쳐졌는데 그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마르셀 뒤샹이다.

 

샘(Fountain)

기존의 미술제작의 방식을 절대적으로 거부했던 뒤샹이 내놓은 해결책은 바로 레디메이드(read-ymade), 즉 공산품을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중 1917년에 발표된 '샘(Fountain)'이라는 작업은 욕실 자재를 파는 가게에서 구입한 남성의 변기로 제작되었는데, 그가 작품제작을 위해 한 것이라고는 구입한 변기를 거꾸로 놓고 그 하단에 'R. Mutt'라는 작가의 서명과 제작연도를 적어 조각대 위에 올려놓은 것이 전부였다. 'Mutt'라는 이름은 당시 대중 위생시설 제작업체였던 '모드철공소'의 이름과 인기 있던 연재만화 '머트와 제프'를 섞어 우스꽝스럽게 작명한 것이었다. 당시 뒤샹은 미국 독립작가협회의 회원이었는데 Mutt라는 가명으로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본 작품을 이 협회가 주최하는 전시회에 출품하였다. 당초 협회 측은 참가비를 낸 작가의 작업은 모두 접수하겠다고 발표를 했기에, 제출 자체는 이루어졌지만 이것이 미술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실제 전시에서는 배제되어 전시 내내 칸막이 뒤에 놓여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회원들은 이 작품의 주인이 뒤샹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이것을 미술로 봐야 할지에 대한 대대적인 논쟁을 벌였는데 결국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불만을 품은 뒤샹은 협회를 탈퇴하였다. 이러한 레디메이드의 등장은 훗날 모던 및 컨템포러리 아트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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