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9년이라는 찰나와 같은 예술가의 삶을 살다 갔지만 '후기 인상주의'의 거장으로서 서양미술사에 큰 획을 그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미술관(Van Gogh Museum)은 일 년 내내 그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온 관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룰 만큼 그의 작품은 길이길이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37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다 간 그의 드라마틱한 삶과 사랑 그리고 연민을 통해 그가 이루어낸 작품 세계를 살짝 엿보려 한다.
고흐의 드라마틱한 삶
고호는 네덜란드의 한 시골마을인 준데르트(Zundert)에서 개신교의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종교인 집안이라는 점과 당시 북부유럽의 검소하고 보수적인 사회적인 배경이 시사하듯 그는 다소 엄격한 가정교육과 신학공부를 받으며 성장하였고, 그는 후에도 아버지와 같은 종교인이 되려고 했을 정도로 개신교에 대한 믿음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첫째 아들로서 부모님의 가장 큰 기대를 받고 자란 그였지만 불행히도 그의 인생은 예상대로 풀려가는 법이 없었다. 성인이 된 후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도록 무엇하나 뚜렷이 이루어 내지 못했다. 학교의 교장선생님 되려고도 하고, 목사가 되려고도 하고, 또한 아트 딜러로서도 잠시 일하면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직업을 갖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렇게 서른이 다 되도록 경제적 독립을 이루지 못한 장남에 대한 염려와 상심이 컸던 그의 부모님은 그가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겠다고 한 선언에 분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네덜란드의 사회 통념상 화가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 초라했고 인생의 실패자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여겨졌었다. 고흐는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별채를 스튜디오를 꾸미고 꿋꿋이 그림을 그렸지만 아들이 이러한 모습을 견디지 못한 부모님과의 수없이 많은 다툼을 하게 되고 결국 집을 나와 독립하게 된다. 이쯤 되면 의기소침해지고 자존감도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을 건만 실제로 그는 그가 화가로서 가는 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그가 그의 동생 테오(Theo van Gogh)와 주고받은 편지에 의하면, 고흐는 자신이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그가 매우 훌륭한 작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작가로서 자기만의 매우 투철한 신념이 있었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추구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아티스트로서 자신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어서인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작품에 대한 비평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갈 길에만 집중하여 달려갔다고 전해진다.
고흐의 사랑
고호는 우리의 인생에서 사랑 때문에 행복하고 아파할 청장년기 만을 살다 갔다. 따라서, 그의 인생의 회고록은 대부분은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 메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흐가 스무 살을 갓 넘기던 해에 그는 영국으로 건너와 런던 시내의 코벤트가든(Covent Garden)에 있는 작은 상업갤러리에서 아트 딜러로서 일을 시작하였다. 런던의 문화와 예술에 심취해 있던 청년의 고흐는 이 시기를 그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했다고 전해진다. 원래 말수가 적고 낯을 많이 가려 사람들에게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지만 가끔 한 번씩 내뱉는 거침없는 언사로 주변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런던 시내에 일하면서 사는 집은 다소 저렴한 지역인 브릭스턴(Brixton)에 세를 들어 살았는데 그 건물 1층에는 집주인 어실라 (Ursula Loyer)와 그녀의 딸 유진(Eugenie Loyer)이 운영하는 작은 학교가 있었다. 여기서부터 고흐의 가슴 아픈 첫사랑이 시작이 되는데 한동안 고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두 여인 중에 그가 사랑에 빠진 대상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공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사랑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그의 동생 테오와 형수 그리고 그의 누이가 서로 주고받은 편지의 기록과 그들이 기억에 의지해야 했기에 그것을 해석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분석을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초창기 연구에서는 고흐가 연모한 사람이 46세의 하숙집 주인 어실라였다고 추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고호의 인생을 거쳐간 3명의 다른 여성들이 모두 연상이었기 때문이었다. 1881년에 사랑에 빠진 그의 사촌 키보스(Kee Vos)는 그 보다 7년 연상이었고, 그다음 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함께 동거했던 시은 호닉(Sien Hoornik)은 그 보다 3년 연상이었다. 그리고, 그가 뉴에넨 (Nuenen)에서 살고 있을 당시 이웃으로 지내던 마르호 베그만(Margot Begemann)과 불같은 사랑을 하게 되는데 그녀는 무려 12살이나 연상이었다. 따라서, 고흐가 연상의 여인에게 매력을 느끼는 스타일이라고 분석한 미술사학자들은 어실라를 고흐의 첫사랑으로 지목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은 2002년에 런던에서 공연되었던 니콜라스 라이트(Nicholas Wright)의 연극 '브릭스톤의 빈센트 (Vincent in Brixton)'에 적용되면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 후에 추가적으로 발견된 고호의 누이 아나(Anna van Gogh)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기록에서 그의 사랑은 집주인이 아니라 당시 19세로 약혼자가 있었던 그녀의 딸 유진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당시 어학연수를 위해 런던으로 와 고흐와 함께 살고 있었던 아나는 당시 젊고 순수했던 고흐의 사랑을 생생히 떠올렸는데 이는 아나가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나는 테오에게 아그네스와 데이비트 코퍼필드의 사랑이 여기서도 곧 이루어질 듯해(I suppose there will be a love between those two, as between Agnes and David Copperfield)라는 문구를 남겼는데, 아그네스와 데이비드는 찰스 디킨즈(Dickens)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약혼자가 있는 아그네스와 사랑에 빠진 데이비드는 결국 아그네스의 약혼을 파기시키고 그녀와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는 이야기로써, 미술사학자들은 이 둘의 사랑이 고흐와 유진의 사랑을 빗데어 표현되었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적인 기원에서 불구하고 결국 고흐의 사랑은 유진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녀는 결국 원래의 약혼자와 결혼을 한다. 이렇게, 견디기 힘든 사랑의 상처를 가슴에 담고 결국에는 그가 그렇게도 좋아했던 런던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간다.
작품세계
서두에서도 간단히 언급했듯이 런던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고흐는 변변한 직업하나 갖지 못한 채 그의 청년기를 모두 보내고 28세 때 비로소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처음에 그는 네덜란드 시골의 전원 풍경과 감자 농사를 하는 농민들을 화면에 담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해바라기(Sunflower, 1888,1889)'와 같은 화려한 색감의 그림을 주로 접한 우리들에게 그의 초창기 작업은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도 있겠다. 왜냐면, 그가 그림을 배우시 시작한 네덜란드는 북부 유럽 르네상스의 거장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와 바로크 미술의 거장 렘브란트(Rembrandt)를 배출한 나라로서 청교도적이고 정적인 색감과 섬세한 묘사가 이 지역 미술의 특징이었고 이곳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한 고호에게는 어쩌면 당연 결과였을 것이다. 부모와 마찰을 빚고 집을 나온 그는 헤이그라는 도시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 시절 그가 모델로 채용한 여인이 바로 그의 세 번째 사랑 시은 호닉이었다. 다섯 살 난 딸아이와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그녀에게 고호는 깊은 연민의 감정을 갖고 그녀가 내뿜는 깊은 마음의 상처와 고뇌를 화폭에 담았다. 그의 대표적인 누드 드로잉 Sorrow (1882)가 바로 이 여인을 모델로 그린 작품이다. 그녀와의 사랑을 정리함과 동시에 고호는 네덜란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당시 근대미술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다. 그의 동생 테오는 당시 센세이셔널했던 인상주의 화풍으로 전성기를 맞고 있던 파리에서 아트 딜러로 활약하고 있었다. 항상 형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던 그는 형 고흐를 미술의 중심지로 불러들이게 되고 이것이 바로 그가 인상주의 작품을 시작하게 된 커다란 터닝 포인트가 된다. 이곳에 와서 고흐는 헨리 드 투르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에밀 베르나드 (Emile Bernard)등의 작가들과 어울리며 다양한 인상주의 작품들을 접하게 되는데 그 특히 자연광에서 발산하는 화려한 색채와 거침없는 붓터치에 매료되었다. 특히, 사교성이 좋고 후배들을 잘 챙기기로 유명했던 피사로(Camille Pissarro)는 내향적인 고호가 파리의 미술계에 적응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고흐는 작가로서의 자존감이 상당히 높았기에 타인의 비평에 흔들림 없이 오롯이 자신의 작업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의 이러한 성격은 파리 인상주의와 조우하면서 고흐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해 내게 하였다. 고흐 하면 우리는 우선 그가 '해바라기(1888,1889)' 작업에서 사용했던 강렬한 노란색을 연상한다.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을 통해 산업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었는데 이는 미술계도 마찬가지였다. 기술의 발전으로 다양하고 화려한 색감의 인공 안료들이 개발이 되어 작가들 특히 인상주의 화가들로 하여금 그동안 자연색에만 의존하던 색감의 한계를 뛰어넘게 하였다. 이렇게 시대적 변화에 커다란 수혜를 받은 고호는 강렬한 색감과 과감한 붓터치에 묻어난 물감의 질감을 살려 '별이 빛나는 밤에(The Starry Night, 1889)', '아이리스(Irises, 1889)' 등과 같은 주옥같이 아름다운 작품들을 우리들에게 남겼다.
자신의 귀를 잘라 동료작가였던 고갱에게 보여주며 그의 비평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는 일화를 남긴 고흐는 우리들에게 괴팍한 천재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삶을 드려다 보면 그는 한없이 여리고 따뜻한 마음 가진 매력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미술 작품에는 그것을 제작한 미술가의 내면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이 되기 마련인데, 그가 남기고 간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미학적인 따스함은 그가 그저 천재화가라서가 아나라 고흐라는 한 인간 자체가 지녔던 따스한 인간미가 그대로 투영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음 글에서는 그가 파리와 남부 프랑스 지역에서 제작한 그의 전성기 시절의 작품들에 대해 더욱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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