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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통한 마음의 웰빙

퍼포먼스 미술의 할머니,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삶과 작품세계

by 웰빙클래스100 2023. 6. 26.

이번글에서는 최근 영국 최고의 미술기관이자 남성중심적인 미술기관으로 정평이난 왕립미술원(Royal Academy of Art)에서 여성으로는 최초로 대대적인 개인전을 앞두고 있는 현대미술의 대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 1946년 11월 30일 ~ )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한다. 스스로를 퍼포먼스의 할머니라고 일컫는 그의 삶과 선구적이며 저돌적인 작품세계를 드려다 보려 한다.

 

Performance view of Artist is Present, 2010, Museum of Modern Art, NY, Photo by Marco Anelli, Courtesy of Marina Abramovic Archives

 

퍼포먼스 미술의 할머니,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세르비아 출신으로 현재는 뉴욕에 살며 국제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개념미술가(Conteptural art)이다. 퍼포먼스(Performance art)라는 현대미술의 장르를 통해 그는 신체와 정신적 한계를 탐구하고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요소들을 작품 안에 담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40년이 넘게 아티스트로 활동한 아브라모비치는 스스로를 ‘퍼포먼스 예술의 할머니’라고 칭할 정도로 퍼포먼스라는 장르에 대한 강한 애착과 믿음을 가지고 이 분야를 개척해 온 선구자이다. 그는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고통, 혈액, 신체적 한계에 직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관찰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냄으로써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개척했다. 그의 퍼포먼스는 시간과 정적 그리고 에너지의 긴 호흡으로 구성되며 이 과정에서 그만큼의 육체적 고통을 함께 동반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의식의 명료함을 최상으로 끌어올린다. 아브라모비치는 유럽과 미국 전역의 유수한 공공미술기관에 초청된 수차례의 개인전과 전시들을 통해 퍼포먼스 아티스트를 행하는 개념미술가로서는 최초로 미술기관의 인증을 받은 작가로 기록되었다. 베니스 비엔날레 (1976년, 1997년)와 독일 카셀 도큐멘타-VI, VII, IX (1977년, 1982년, 1992년)를 포함한 다수의 대규모 국제 전시회에 참가했으며 올해에는 영국 최고의 보수적인 미술기관 왕립미술원의 전시관 본관에서 여성작가로는 최초로 대규모의 개인전을 갖게 된다. 또한, 미래 퍼포먼스아트의 연구와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비영리예술 재단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연구소 MAI (Marina Abramovi Institute)를 설립했다.

 

작가의 삶

아브라모비치는 1946년 11월 30일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났다. 한 미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아브라모비치는 자신의 가족을 "붉은 부르주아 계급"이었다고 묘사했다. 그녀의 증조부는 세르비아 정교회의 대주교였고, 몬테네그로 태생의 부모님 다니카 로시치와 보진 아브라모비치는 모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새 정권을 위해 일하며 전후 정부로부터 인민 영웅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6살 때까지 신앙심이 깊었던 조부모 밑에서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배우며 자랐다. 그가 6살이 되던 무렵 남동생이 태어났고 이후 부모님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작가는 피아노, 프랑스어, 그리고 영어 수업을 들으면서 다양한 조기교육을 배우며 자랐지만 미술 수업을 듣지는 못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즐겼다고 전한다. 그러나 신체적 체벌을 개의치 않는 부모 밑에서 매우 보수적이고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란 그는 스물아홉이 될 때까지 10시 이후에는 절대로 집 밖을 나갈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를 겪었던 어머니 또한 끔찍한 결혼생활의 희생양이기도 했다. 이렇게 불행하고 불완전했던 유년시절을 겪은 그를 제대로 숨 쉬게 해 주었던 곳은 미술계로의 입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65년부터 1970년까지 베오그라드에 있는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 후 1972년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있는 미술 아카데미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세르비아, 네덜란드, 파리, 베를린에 있는 유수의 미술학교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그의 미술세계를 본격적으로 펼쳐 나아갔다.

 

작품세계

1970년대 초 고향 세르비아로 돌아와 베오그라드에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아브라모비치는 시각적 미술의 형태로 퍼포먼스 미술이라는 장르를 개척해 왔다. 그는 초창기 작업인 ‘리듬 (Rhythm)’시리즈를 필두로 하여 관객 참여적 퍼포먼스를 연출하였는데, 자신 스스로를 퍼포먼스의 오브제로 내어놓으며 관객들 또한 작품의 일부로 전환시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그의 작품에 적용하였다. 이렇듯 육체는 항상 그의 작품의 주체이자 매개체가 되어왔다. 작가는 현대인들의 일상을 구성하는 간단한 행동을 의식화하는 작품을 통해 그의 신체적, 정신적 한계를 경험하고자 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감정적, 정신적 변화와 함께 고통, 탈진등을 경험하며 죽음과 삶의 경계를 오갔다. 1975년부터 1988년까지는 그의 인생의 동반자이자 예술의 동지였던 독일 예술가 울라이(Ulay)와 함께 퍼포먼스를 통해 이중성의 관계를 다루었다. 울라이와 결별 후 1989년부터 다시 파트너 없이 혼자 작업을 진행했다. 2010년에 뉴욕의 현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에서 발표했던 'The Artist Is Present (2010)’에서 그는 3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8시간 동안 움직임 없이 의자에 앉아 앞에 마주한 낯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과 말없이 눈을 마주치며 공감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하루하루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손바닥 만한 휴대폰에 의지 한 채 인간대 인간의 공감을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뉴욕의 대중들은 본 전시를 통해 울고 웃었으며 이 퍼포먼스를 통해 작가는 그의 전문 분야에서 더욱 단단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이렇게 아브라모비치가 행하는 미술은 특히 코로나라는 예상치 못한 전염병으로 인해 어느새 비대면에 익숙해진 우리 현대인들에게 더욱 필요한 예술의 치료제가 되지 않을지 생각해 본다. 올 하반기 영국의 관객들은 작가의 작품 안에서 어떠한 감정적 울림을 받을지 많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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