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술을 통한 마음의 웰빙

잭슨 폴록의 작품세계

by 웰빙클래스100 2023. 7. 12.

이번 글에서는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예술세계에 대해 다루어 보겠습니다. 액션 페인팅이라는 그만의 회화 기법과 작품관을 알아보고 그의 작품세계가 후대 문화 예술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도 다루어 보겠습니다. 

 

잭슨 폴록의 '섬머타임: 넘버 9A' 작품일부, 이미지 출처-테이스 모던

 

잭슨 폴록에 대하여

폴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1912년 1월 28일 - 1956년 8월 11일)은 미국의 중요한 아티스트입니다. 그는 미국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추상 표현주의 운동에서 가장 주축을 이룬 인물로서 그의 '드립 기법 (dripping)'으로 유액 형태의 가정용 페인트를 수평면에 부어 떨어뜨리거나 튀기며 그것이 만들어 내는 우연적 이미지를 의도하는데,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캔버스를 모든 각도에서 볼 수 있고 그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우연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작업실에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춤을 추며 전신의 힘을 다해 캔버스전체를 페인트로 덮었는데 이를 '올 오버 페인팅(all-over painting)' 혹은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폴록만의 아방가르드 한 추상화 형식은 비평가들 사이에서 분분한 반응을 일으켰으며, 일부는 창작의 즉흥성을 찬양하였던 반면에 다른 사람들 이러한 무작위적인 효과를 맹 비난했습니다. 1945년에는 동료 화가였던 리 크라스너(Lee Krasner)와 결혼하게 되는데 이는 폴록의 작품세계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오는 계기가 됩니다. 평소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했던 폴록은 음주 운전 차량 사고로 44세의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 4개월 후 1956년 12월에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추모전이 개최되었습니다. 1967년에는 그의 작품을 보다 크고 포괄적으로 전시한 전시회가 이곳에서 개최되었습니다. 1998년과 1999년에는 폴락의 작품이 뉴욕의 MoMA와 런던의 테이트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영예를 받았습니다.

 

드립 시기, 액션페인팅

폴록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 즉 '액션 페인팅'의 형대를 한 작업들은 주로 1947년부터 1950년까지에 제작되었는데 현대 미술사에선 이 시기를 '드립 시기(drip period)'라고 합니다. 1949년 8월 8일 발행된 미국의 저명한 라이프 매거진은 4면에 폴록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과연 그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현대 화가인가?'라는 의문을 던졌는데 이는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계기가 됩니다. 폴락의 친한 친구인 미술사학자 알폰소 오소리오(Alfonso Ossorio)와 미셀 타피에(Michel Tapié)의 소개로 폴록은 파리의 폴 파케티(Paul Facchetti) 갤러리 '스튜디오 폴 파케티(Studio Paul Facchetti)'에서 드립페인팅들을 모두 모아 개인전을 치르게 되는데 이후 폴록은 작가로서 많은 유명세를 얻게 됩니다. 이후 그는 더 큰 갤러리 시드니 자니스 갤러리로 옮겼으며 컬렉터들로부터의 그의 작품에 대한 수요는 점점 더 증가했습니다. 폴록의 이러한 성공은 그의 아내였던 리 크라스너(Lee Krasner)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트 딜러인 존 버나드 마이어스(John Bernard Myers)는 '크라스너 없이는 잭슨 폴락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동료 화가였던 프리츠 불트만(FritzBultman) 은 폴락을 크라스너의 "창조물, 그녀의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했습니다. 미술 이론과 실기의 기반이 탄탄했던 그의 아내는 폴록에게 현대 미술과 기법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가르쳤고 훈련시켰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폴록의 경력에 도움이 될 비평가, 컬렉터, 다른 화가들도 많이 소개해 폴록의 작품이 미술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전략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폴락은 원래 동료 화가들과 자신의 작품에 대한 조언을 구하였는데 결혼 이후에는 그의 아내가 바로 그가 가장 믿을 수 있는 비평가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폴록의 예술세계가 후대에 미친 영향

폴락의 캔버스에 페인트를 스테이닝 하는 기법은 컬러 필드 화가인 헬렌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와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에 의해 차용되었고,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는 '올 오버' 기법을 차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 스타일을 구축하였습니다. 해프닝(Happenings) 예술가인 앨런 카프로우(Allan Kaprow), 조각가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에바 헤세(Eva Hesse) 등 많은 현대 예술가들은 그의 작품이 가지는 시각적 형태보다는 그 창작 과정에서 보인 태도를 계승했습니다. 2004년에는 '원: 넘버 31, 1950(One: Number 31, 1950)'이 500명의 예술가, 큐레이터, 비평가, 아트딜러를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현대 예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 8위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영향은 비단 현대미술에만 국한되지 않고 대중문화에도 뻗어 나갔습니다. 1990년대 초에 폴락의 생애를 다룬 세 개의 영화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제프리 포터(Jeffrey Potter)의 1985년 구술 전기인 "폭력의 무덤으로(To a Violent Grave)"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의 트라이베카 프로덕션(TriBeCa Productions)과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의 바우드 필름스(Barwood Films)가 공동 제작하고 각각 폴록과 크라스너역할을 맡기로 하였는데 이 영화는 결국에 실현되지 못합니다. 실제로 드니로의 부모님은 폴록과 크라스너 커플과 두터운 친분관계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외에도 2000년에는 제프리 포터(Jeffrey Potter)의 퓰리처상 수상 작품 '잭슨 폴락: 미국의 전설(Jackson Pollock: An American Saga)'을 바탕으로 한 영화 '폴록(Pollock)'이 개봉되었습니다.

 

 

1960년대 미국의 추상표현 미술은 냉전시기에 구 소련에 대응하며 예술을 통해 자국의 위상을 높이려는 미국 정부의 전략적 예술 전술이기도 했다. 지금 미국 현대미술의 근간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사조를 대표하는 잭슨폴록은 비록 4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작품들은 지금도 미술학도들의 중요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