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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통한 마음의 웰빙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삶과 예술

by 웰빙클래스100 2023. 7. 9.

요셉 보이스는 독일의 예술가이자 정치가 그리고 교육자로 기록된다. 그는 독일의 플럭서스 (Fluxus) 운동을 통해 한국의 거장 백남준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 라는 주장을 통해 사회적 치유와 변화를 추구했다. 이번글에서는 이러한 요셉 보이스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요셉 보이스,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 1965, c. ZKM

요셉보이스의 삶

요셉 보이스는 1921년 5월 12일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크레펠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클레베르에서 보낸 그는 동식물, 조각, 과학, 기술 등에 큰 흥미를 갖게 되었고, 소아과 의사가 되기를 꿈꾸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보이스는 1940년에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마치고 독일 공군에 입대하여 폭격기 부조종사로 복무하였다. 그러나 1943년에 탑승한 JU-87기가 러시아 크림 반도에서 격추되었다. 보이스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타타르인 유목민족에 의해 발견되어 치료를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이 부분은 그의 예술 경력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전쟁 후, 보이스는 1947년에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Kunstakademie Dusseldorf) 입학하여 조각을 전공하였고 그 이후 플렉서스 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펼친다. 보이스는 사회와 정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술을 통해 사회 변화를 이루고자 했다. 그는 1967년에 독일 학생당을 창당하여 학생들의 요구를 대변했으며, 1972년에는 카셀 도큐멘타 5에서 "국민투표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 조직"이라는 사무실을 열어 관람객들과 함께 민주주의와 예술에 대한 토론을 진행했다. 그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의원 선거와 유럽 의회 선거에서도 후보로 나섰다. 교육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한 보이스는 1971년에 자유 국제 대학을 설립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공부하고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입학시험에서 떨어진 학생들을 위해 사무실 점거를 통한 시위도 벌였다. 하지만 1979년에는 교수직에서 해임되는 등 열정적인 교육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보이스는 1986년에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심장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작가의 예술관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보이스는 전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산전수전을 겪은 그는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947년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조각을 공부하였다. 1950년대 초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1953년 본 더 하이트 박물관(Von der Heydt Museum)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그가 작품활동을 시작한 50년대 초반부터 조세프 보이스는 '조각'에 대한 개념을 연구하며, 이 개념은 50년대 중반의 시대적 위기 상황과 깊게 관련이 된다. 보이스는 당시 삶과 죽음 사이의 문턱에서 헤매었던 개인적인 죽음에 대한 체험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발견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발견된 개념은 앞으로 펼쳐질 그의 작품 철학이 정립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개념은 확장된 미술 개념으로 발전하며, 그는 유물론, 이데올로기, 근대 자연과학, 실증철학의 물질관계를 적용하여 그 개념을 더욱 탄탄히 보완했다. 1961년에 그는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의 조각과 교수로 임영된 후 플럭서스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1963년 플럭서스 페스티벌에서 그의 첫 행위 예술(Performance)인 '플럭서스 시베리안 심포니 1악장'을 발표했다. 그 후 보이스는 평생 동안 약 70여 회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국내외적으로 그의 명성을 떨쳤다. 미래의 자연과학은 비과학적인 측면 없이는 진행될 수 없듯이, 우리도 물질적인 세계에서 살면서도 실제로는 비물질적인 세계에서도 생활하고 있다. 이렇듯 보이스는 미술이 비미술을 포함한다고 강조하며, 미술가, 시인, 음악가가 비미술적인 영역에 참여함으로써 그것을 표현하고 창작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개념, 인간의 존재적 본질과 죽음 이후의 삶, 탄생과 죽음 사이의 삶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표작품 -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는 보이스의 퍼포먼스 작품으로, 그의 예술적 탐구와 창의적 표현의 일환으로서 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기록된다. 1965년에 발표된 본 작품은 보이스가 얼굴에 꿀과 금박을 뒤집어 쓰고, 펠트와 쇠로 만든 밑창을 신고, 죽은 토끼를 품에 안고 약 세 시간 동안 미술관에서 진행한 퍼포먼스형태의 개인전이었다. 본 작품에서 보이스는 예술 작품과 죽은 토끼를 결합하여, 생명과 죽음, 변화와 부활, 에너지의 전이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토끼를 자신의 작품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동물로 선택한 이유가 토끼는 토양, 육화, 재생, 부활과 같은 여러 상징적인 개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상징성이 깃든 작품을 통해 죽음과 삶의 경계를 탐구하고자 했다. 본 퍼포먼스에서 보이는 얼굴에 벌꿀과 금박을 뒤집어쓰고, 신발에는 펠트와 쇠로 만든 밑창을 끼고 있는 등 자신의 몸에 여러 가지 상징적 요소를 더했는데, 벌꿀은 생명과 에너지를, 금박은 정신적인 광채와 영원성을, 그리고 펠트는 온기와 보호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쇠는 변화와 형태의 유연성을 나타낸다. 보이스는 예술 작품이 죽은 존재에게 생명과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해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동안 토끼에게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한다. 관객들은 공연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유리창을 통해 보이스의 퍼포먼스를 관찰하게 되는데 이는 퍼포먼스의 현장 자체를 미술관에 설치된 작품의 하나로 간주되게 하여 이 작품을 관람하는 행위를 통해 예술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도를 강조하였다. 이 작품은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 라는 보이스의 예술적 신념과 철학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예술이 사회적 변화와 치유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의미를 전달하며, 예술 작품을 통해 사회적 혹인 사회에 기인하는 무형적 조형물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보이스는 예술의 역할과 가치를 재해석하고, 예술이 개인과 사회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 그의 퍼포먼스 작업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는 예술과 삶, 죽음과 부활, 인간과 자연 등의 주제를 사유적이고 심미적인 방식으로 탐구하는 보이스의 걸작 중 하나이다. 그의 독창적인 퍼포먼스와 상징적인 요소들은 관객들의 사유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감정을 자극하여, 예술의 한계와 가능성을 사색하게 한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던 독일의 작은 도시 카셀. 이러한 카셀의 가졌던 상흔을 예술로 치유하고 도시를 재 부흥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카셀도큐멘터의 1982년 버전에서 그는 '7000그루의 참나무'심기 프로젝트를 제안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그의 사후엔 그의 아들 빈젤이 뒤를 이어 1987년 도큐멘타에서 7000번째 참나무를 심으면서 프로젝트를 완성시켰다. 작은 묘목에 불과했던 나무들이 지금은 울창한 나무숲을 이루어 지금까지도 보이스가 주장했던 예술의 사회적 가치, 인간성회복과 실천적 삶 그리고 그 숭고한 가치들이 공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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