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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통한 마음의 웰빙

마담 드 퐁파두르(Madame de Pompadour)의 일생과 마지막 초상

by 웰빙클래스100 2023. 7. 2.

18세기 프랑스의 국왕 루이 15세의 공식 정부로 잘 알려진 퐁파두르 후작부인(마담 드 퐁파두르)에게는 이보다 더 많은 수식어들이 뒤따른다. 18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여성으로 기록되는 그는 로코코 시대를 대표하는 패션의 아이콘이자 가장 파워풀한 셀러브리티였으며, 당대 예술의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후원인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 초상화를 통해 그녀의 일생과 그녀가 프랑스 국익을 위해 기여한 업적들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Francois-Hubert Drouais, 'Madame de Pompadour at her Tambour Frame, 1763-1764', c. National Gallery, London

 

잔-앙투아네트 푸아송

잔-앙투아네트 푸아송(Jeanne-Antoinette Poisson)은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본명이다. 그녀는 매우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비록 집안이 막강한 부를 가지고 있어 신흥 부르주아 계층에 속했지만 실제로는 귀족이 아닌 평민계층에 불과했다. 기록에 의하면 신분상승으로 인한 명예를 갈망했던 부모님의 욕망으로 인해 퐁파두르는 어려서부터 왕의 후궁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으며 가꾸어졌고 교육받았다. 뛰어난 미모를 타고나기도 했던 어린 퐁파두르는 파리 오페라의 현역 성악가를 비롯한 다방면의 전문가들에게 개인 교습을 받는 등 그 당시 여성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In 1741년 촌수로 조카벌되는 남성과 정략결혼을 하고 딸을 낳아 Château d'Etoilles에 정착하였다. 예술에 탁월한 안목과 지식을 지녔던 그녀는 그곳에 '살롱 (예술가들의 모임)'을 만들어 당대의 극작가, 문학가, 화가, 철학가 등과 교류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왕의 여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항상 엿봤다고 전해진다. 그러던 중 1745년 퐁파두르는 궁전에서 개최된 파티에 초대를 받게 되는데 이때 국왕 루이 15세와 처음으로 조우하게 되고 이날부터 바로 그들의 파란만장한 20년의 역사가 시작된다.

 

사랑의 출발점

루이 15세는 지극히 감성적이면서 우울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최고의 권력자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공허한 빈자리로 헛헛해했고 이러한 공허함을 여성의 온기로 채우고자 했다. 퐁파두르에게 한눈에 반한 그는 그녀를 바로 공식적인 정부로 들이고 그녀에게 퐁파두르 '후작'이라는 작위를 내리므로 해서 그녀의 가문은 하루아침에 귀족으로 신분상승된다. 사실 루이 15세는 당시 본 부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부인에 대한 애정과 존경의 마음이 있었던 터라 새로운 정부를 들이는 것에 대해 많은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를 감지한 퐁파두르는 국왕을 자신의 곁에 묶어두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이를 위해 예술은 그녀에게 매우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그녀는 왕을 위해 여러 개의 샤토와 저택을 마련하여 그곳들을 최고의 미술과 장식품들로 꾸며서 럭셔리하면서도 밝고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내었고 국정으로 피곤했던 루이 15세가 그곳에서 온전히 쉴 수 있게 했다. 이렇게 가꾸어진 그들만의 천국에서 국왕은 그를 괴롭게 했던 모든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퐁파두르와 함께하는 시간들을 즐기게 되었다. 특히, 퐁파두르는 반루(Vanloo), 부쉐(Boucher)와 같은 당대 최고의 화가들에게 커미션 해서 왕과 자신의 사랑을 담아 미학적이고 시각적인 내러티브를 부여하였다. 이와 더불어, 당시 프랑스 최대의 공예수집가였던 그녀는 로코코의 형태를 띤 다양한 원석들과 이로 만들어진 공예작품들을 수집하였는데 특히 핑크색으로 돤 대리석을 즐겼으며 그녀가 유독 좋아했던 핑크색 톤은 'Pompadour Pink'라고 불리며 귀족들 사이에 엄청난 인기를 끌기도 했다.

 

'Madame de Pompadour at her Tambour Frame, 1763-1764'

퐁파두르는 이후 여러 번의 유산을 경험하면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다. 이로 인해 5년 남짓했던 그녀와 루이 15세와의 육체적인 관계는 끝을 맺게 되고 그들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플라토닉 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왕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한다. 퐁파두르는 그녀의 거쳐를 훨씬 더 웅장하고 화려한 곳으로 옮겨 아름답고 지적인 미술작품들을 이용해서 그녀의 이미지를 다시 브랜딩 한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작가들에게 그와 왕의 우정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그리게 하여 그녀와 왕의 관계가 아직도 공고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렸다. 특히 그녀가 죽기 전 Francois-Hubert Drouais에게 주문했던 초상화에서 'Madame de Pompadour at her Tambour Frame, 1763-1764'은 이를 잘 투영한다. 작품에서 그녀는 존경스럽고 교양 있는 중년의 부인으로 그려져 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와 실내의 인테리어는 그녀의 수준 높은 취향을 반영한다. 주변의 책들과 만돌린 악기 그리고 그녀가 그린 드로잉 작품들이 담겨있는 포트폴리오 화집은 그녀가 평생 동안 일구었던 지적이고 예술적인 업적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작품에서 그녀는 자수틀을 무릎에 놓고 수를 놓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프랑스의 여느 귀족 부인의 일상의 모습일 수도 있으나 퐁파도르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왕의 뒤에서 숨은 실력자였던 그녀는 수를 놓는 시간을 국정을 의논하는 시간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녀가 수를 놓는 행위는 정치인으로서 업무를 하는 것과 비례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국왕의 공식적인 애첩이 국정에 관여하는 것은 공공연한 일이었으나 그녀의 스케일은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영향력은 왕궁에서 관여하는 국내외의 모든 정책에 반영되었다. 특히 문화 예술과 관련해서 그는 비공식적이지만 문화부 장관이나 다름이 없었다. 누구든 그녀의 뜻을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갈아치워 졌다. 1750년대 중반부터 퐁파두르는 특히 외교 정책에 더욱 관여하였는데 이는 프랑스를 7년 동안 전쟁의 덧으로 몰아넣게 되며 이로 인해 그녀의 인생 또한 빛을 바라게 된다. 이러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퐁파두르는 그녀의 마지막 초상화가 완성되는 것을 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마감하게 된다.

 

 

비록 퐁파두르의 업적에 대한 많은 비판적인 평가들도 있으나 미술의 역사에서 보면 그녀는 당시 프랑스의 로코코 미술과 공예산업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숨은 공신이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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