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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통한 마음의 웰빙

풍경화의 대가 존 콘스터블의 생애와 작품세계

by 웰빙클래스100 2023. 7. 25.

존 콘스터블(John Constable, 1776 - 1837)은 미술의 피라미드 제일 밑에 위치했던 '풍경화'라는 미술의 장르를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급부상시킨 영국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이번글에서는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영국의 풍경화가 콘스터블의 일생과 작품세계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한다. 

 

Daniel Gardner, ‘Portrait of John Constable’, 1796, The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 Stapleton Collection / Bridgeman Art Library

 

콘스터블의 생애

존 콘스터블은 영국의 지방도시 써포크(Suffolk)의 이스트 버골트에서 골딩과 앤 콘스터블 부부의 네 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작가는 그의 고향 써포크 지역의 전원 풍경들을 캔버스에 담아  영국 시골의 풍경을 아름다운 이미지로 재현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야외에서 직접 그린 여러 개의 스케치들을 실내의 스튜디오로 돌아와 다시 조합하여 대형의 캔버스로 옮기는 형식을 취함으로 해서 청명한 자연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담아내려는 많은 연구를 하였다. 오늘날에는 영국을 대표하는 대가로 미술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당시 영국에서는 많은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당시 영국인들은 자국의 아티스트보다는 해외에서 온 새로운 경향과 아티스트들의 창작성에 더욱더 매료되는 경향이 있었던 터라 영국에서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지만 이후 파리로 이주해 작업한 기간 동안 프랑스 컬렉터들의 취향을 사로잡아 프랑스에서 작가로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본래, 콘스타블은  집안의 가업을 도와 스털 강과 주변 지역에서 곡물과 석탄을 거래하고 운송하는 일을 하며 미술은 취미로 시작했다. 1795년에 아마추어 화가이자 아트 컬렉터였던 조지 보몬트(Sir George Beaumont)를 만나 보몬트의 명화 컬렉션들을 접하게 되면서 그는 아티스트로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이하게 된다. 또한, 이 기간 콘스타블은 미술사와 미술 이론에 대한 기초를 탄탄히 다지게 된다. 이후 런던의 왕립미술원(Royal Academy of Art)에서 수학하였고 졸업 후 본격적인 작가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대부분의 전문 화가들처럼 콘스터블은 아트 콜렉터 및 딜러들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런던으로 이주한다. 1816년에 마리아 비크넬(Maria Bicknell)과 결혼하고, 다음 해에 블룸즈버리(Bloomsbury)에서 가족을 꾸렸다. 그러나 런던 시내에 에서의 삶이 그와 가족들에게는 맞지 않았기에 시내 바깥의 주거지역인 햄스티드(Hampstead)로 이주하여 살게 된다. 프랑스 파리의 살롱전에 출품하며 프랑스 미술계에도 데뷔하였으며 그는 프랑스 미술계를 사로잡으며 바르비종 학파와 프랑스 낭만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등 프랑스 미술계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풍경화의 대가 콘스터블

콘스터블은 당대 함께 활동했던 토마스 게인스버러와 마찬가지로, 야곱 반 로이스달(Jacob van Ruisdael)과 같은 네덜란드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와 클로드(Claude)의 작품들로부터 깊은 색감과 구도를 익혔다. 하지만, 콘스터블의 풍경화에서 보이는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자연의 모습은 그만의 독창적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콘스터블의 전기 작가인 C.R. 레슬리(C.R. Leslie)는 콘스터블이 일생동안 남긴 작품들을 '작가가 느낀 감정들을 기록한 역사'라고 표현했다. 콘스터블 자신도 회화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감정을 표현하는 또 다른 언어일 뿐이다'라고 기술했다. 그는 자신의 나고 자란 고향의 전원의 모습에 강한 향수를 가졌으며, 특히 스털 강의 경관을 매우 좋아했다. 또한, 런던의 햄스티드와 솔즈베리의 풍경도 종종 그렸는데, 이는 콘스터블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솔즈베리 주교의 조카 존 피셔가 거주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콘스터블은 레이크 디스트릭의 풍경을 그리기 위해 스케치 여행을 하던 중에 자신을 가장 신선한 눈과 열린 마음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느끼며 회화로 재현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연구를 하였는데 그는 이를 노동 집약적인 작업이라 표현했다. 이렇듯 콘스터블의 작품들은 여러 해에 걸쳐 다양한 오일 스케치, 연필 드로잉, 수채화 스터디등 복잡한 과정을 통해 완성되었다. 가족이 점점 늘어나면서 경제적 압박을 받은 작가는 상업적인 성공을 위해 매진했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The Hay Wain (1821)와 The Leaping Horse (1825), 그리고 6개로 구성된 스토(Stour) 강의 대형 풍경화를 제작하였는데 여기에 담긴 자연의 청명함과 빛의 아름다움은 만고의 노력이 담긴 세밀한 오일 드로잉의 과정이 전제되었다. 1820년대 초 런던 햄스티드 지역에 머무를 당시 구름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묘사한 시리즈에 착수했는데, 그는 친구인 존 피셔에게 쓴 편지에 풍경화 화가에게 하늘의 표현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명시했다. 아내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브라이튼에서 그녀가 사망하기 전까지 머물었는데 당시 작가가 남긴 이 지역을 담은 드로잉과 오일 스케치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콘스터블과 낭만주의 미술

낭만주의 운동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유럽 미술과 문학에서 유행했던 사조이다. 이 운동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강조하며,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표현에 중점을 두는 특징을 가졌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콘스터블은 자신만의 회화적 기법을 낭만주의 미술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낭만주의 미술의 주요 원리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감각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낭만주의의 감정적인 성향을 반영하였다. 또한 그는 작품에서 빛과 색상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풍경에 투영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작품 특징들은 낭만주의 미술의 주요 원리들과 잘 부합하며, 그의 작품들이 낭만주의 운동의 주요 기조를 따라가는데 영향을 끼친다. 그의 1821년 작품 '무지개와 함께한 풍경화(1821)에는 무지개를 통하여 아름답지만 덧없기도 하며 보이지만 만질 수 없는 인간의 삶을 표현하였는데 이는 당시 낭만주의에서 주로 다루어졌던 주제이기도 했다. 그는 이후의 수채화 작품 '스톤헨지(1835)'에서도 두 개의 무지개를 반복해서 그렸다. 이렇듯, 콘스터블은 낭만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산악 풍경이나 조국의 풍경을 통해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담았다. 

 

 

위에도 기술하였듯이 존 콘스터블의 예술은 낭만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며, 낭만주의의 감정적인 성향과 잘 부합한다. 그의 작품들은 낭만주의 운동의 주요 원리들을 반영하면서도 독자적인 아름다움과 감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그가 낭만주의 미술에 끼친 영향력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이다. 콘스터블의 작품은 낭만주의 미술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는 점에서 서양 미술사에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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