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는 1950년대 서양 현대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팝아트(Pop Art)의 역사와 개요에 대해 알아보고, 그 원산지인 영국과 미국의 팝아트의 성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팝아트의 기원
팝아트는 1950년대에 떠오르기 시작하여 1960년대에 꽃 피운 현대 미술사조 중 하나이다. 영국과 미국에서 번성한 예술 운동으로, 대중문화와 상업 미술이 가지는 모티브들을 바탕으로 한다. 팝아트는 고전적인 예술과 문화에 대한 접근 방식과 예술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에 반발하여 생겨난 혁신적인 미술사조이며, 기존의 전통적인 미술의 형식을 부정하고 그에 반하는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미술을 소재로 사용하였다. 할리우드 영화의 이미지, 광고, 제품 포장, 팝 음악, 만화, 애니메이션 등 대중문화가 가지는 다양한 요소들을 주된 소재로 하며 일시적이고 반복적인 소비성을 작품에 적용했다. 또한, 스텐실이라는 상업적인 판화 기법을 통해 예술 작품도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 생산되어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미술의 형태를 만들고자 하였고, 이는 새롭고 다이내믹한 취향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젊은 세대의 취향을 저격하였다. 팝아트는 또한 유머스럽고, 매혹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종종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곤 하였는데 현대미술 비평가들은 이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팝아트가 '저급한' 주제를 다루며 예술 작품에 담겨야 할 의미 있는 콘셉트나 비판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며 가치 없는 미술로 치부했다. 실제로 미국 팝 아트의 대표작가인 앤디 워홀이 1980년대에 런던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을 당시 런던의 아트 컬랙터들은 미국에 넘어온 팝아트 스타 작가였던 워홀의 작품에 대해 다소 당황스러워했다고 전해진다. 미국에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가이지만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받고 있는 그의 미술 세계에 대한 금전적인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당시 영국의 보수적인 아트 컬렉터들에게는 도박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실제로 팝 아트는 그 어느 장르의 미술보다 많은 인기와 상업적인 성공을 누리고 있으며, 원래의 가지였던 '대중적인 미술'이라는 의미에서 벋어나 일부 극소수의 재력가들만이 누릴 수 있는 비싼 미술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더불어, 현대 미술의 역사에서 팝 아트는 기존의 보수적인 예술의 접근 방식을 뛰어넘어 새로운 주제들을 다루며 그 표현의 형식과 재현방법에 있어서도 매우 새롭고 신선한 접근을 시도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초기 양상 중 하나로 간주된다. 이후 팝 아트는 1970년대까지 전 세계의 미술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국과 영국의 팝아트
미국 팝 아트와 영국 팝 아트는 유사한 주제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영국 팝 아트는 종종 미국 팝 아트와는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영국의 초기 팝 아트는 미국 대중문화를 멀리서 바라보며 발전했으며, 반면에 미국의 예술가들은 미국 문화 속에서 직접 경험하고 본 것에 영감을 받았다. 미국에서 팝 스타일은 추상 표현주의의 화려한 해체 후에 현실적인 예술(시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시각 세계를 묘사한 예술)과 단단한 선과 명확한 형태의 사용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팝 아트 작가들은 표면적이고 평범한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개인적인 감정과 상징성에 대한 강조를 피하고자 했다. 이는 추상 표현주의의 특징인 개인적인 표현과 내면성에서 벗어나는 시도였다. 한편, 영국의 팝 아트 운동은 보다 학문적인 접근을 가졌다. 아이러니와 패러디를 사용하면서도, 이 운동은 주로 미국 대중문화 이미지가 무엇을 나타내고 어떻게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문화의 상품화와 이를 통한 사회 조작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고자 했다. 1950년대 예술 그룹인 '독립 그룹(The Independent Group, IG)'은 영국 팝 아트 운동의 전신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그룹은 예술, 기술, 대중문화의 교차점을 탐구했다. 영국 팝 아트 작가들은 문화의 상품화와 사회적 영향에 대한 의미를 담아 아이러니와 패러디를 그들의 작품에 동시에 표현하였다. 미국의 팝 아트는 대중문화를 비판하며 현실적인 예술을 되살리기 위해 단단한 선과 명확한 형태를 사용하였던 반면에 영국의 팝 아트는 문화의 상품화와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아이러니와 패러디를 통해 표현하였다.
리처드 해밀턴
영국을 대표하는 팝아티스트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 1922-2011)'은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로열 아카데미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40년에는 정부 훈련 센터에서 엔지니어링 도면 기술을 공부하고 '지그 앤 툴(jig and tool)' 디자이너로 일했다. 1946년에 다시 로열 아카데미 스쿨에 입학하였으나 본 미술학교가 제공했던 전통적인 회화 교육 스타일을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려 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이후 작가는 1948년부터 1951년까지 영국의 또 다른 미술명문 '슬레이드 스쿨 오브 아트(Slade School of Art)'에서 수학했다. 1950년에는 런던의 Gimpel Fils 갤러리에서 그의 첫 판화전을 열었는데, 출품된 작품들은 1913년 작으로 1942년에 재 출간된 D'Arcy Wentworth Thompson의 'On Growth and Form'이라 글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실제로 이 글은 해밀턴의 초기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해밀턴은 1951년에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 (ICA)에서 'Growth and Form' 전시회를 기획하고 디자인했으며, 1955년에는 뉴캐슬의 해톤 갤러리와 ICF에서 'Man, Machine and Motion' 전시회를 기획하고 참여했다. 1955년에는 한오버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었으며, 1956년에는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열린 'This is Tomorrow'에 참여하여 포스터와 카탈로그를 위해 '오늘날의 집이 어떻게 이렇게 다른지, 매력적인지(Just what is it that makes today's homes so different, so appealing?)라는 콜라주 작품을 제작했다. 1957년에는 빅터 패스모어와 함께 Hatton 갤러리와 현대 미술 연구소에서 'an Exhibit'을 기획하고 주최했다. 해밀턴은 독립 그룹(Independent Group)의 멤버이기도 했는데, 이 그룹은 1950년대에 현대 미술 연구소에서 모인 예술가들과 작가들로 구성되었으며, 그들의 심포지엄은 영국에서 팝 아트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해밀턴은 비평가 로렌스 알로웨이의 '좋은/팝 아트 연속체(fine/pop art continuum)' 이론의 주요 실천자 중 한 명이었다. 해밀턴은 이를 '모든 예술은 동등하다 - 가치의 계급 구조가 없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긴 선의 한쪽에 있고, 피카소는 반대편에 늘어져 있다... TV는 뉴욕의 추상 표현주의와 같은 영향력이 더하거나 덜한 것이 아니다'라고 해석했다. 그는 1960년에 뒤샹(Duchamp)의 '그린 박스(Green Box)'의 타이포그래픽 버전을 디자인하였고, 1965-6년에는 뒤샹의 지도를 받아 뒤샹의 '신부는 남자로부터 벗겨진다(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lors, Even)'를 재구성했다. 해밀턴은 또한 1980년대부터 당대의 최첨단 기술을 자신의 작품에 도입하기 위해 컴퓨터로 생성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프린트 메이커로 활동하였으며, 1983년에는 'World Print Council Award'를 수상했다. 1993년 그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영국국가관을 대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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